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총독부 청사 (문단 편집) === [[광복|해방]]과 그 이후 === ||<:> [YouTube(L0q1kYyO3AA)] || || [[1945년]] [[9월 9일]] [[미군]]에 항복하는 마지막 [[조선 총독]] [[아베 노부유키]] || ||<:> [[파일:external/41.media.tumblr.com/tumblr_nr0t1jpTPq1tz17l3o1_1280.jpg|width=100%]] || || [[1953년]] [[8월 15일]] 중앙청 광장[* 참고로 2023년 3월 7일, [[경복궁]] [[경복궁 광화문|광화문]] [[월대]] 복원공사 중 땅을 파다가 사진에 보이는 전차 궤도가 발굴되었다. 이 노선은 [[서울전차]] 효자동선으로 일제강점기 부설 당시에는 경성전차 고궁지선이라 불렀다.[[https://twitter.com/Jeanfortruth/status/1632714016375316480?s=20|#]]] || [[태평양 전쟁]]으로 인해 [[일본]]이 연합군에 항복하자, [[1945년]] [[9월 9일]] [[서울]]에 진주한 [[미합중국 육군]]이 총독부 청사를 [[미군정]]청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. 그날 오후에 총독부 청사의 제1 회의실에서 [[미합중국 육군]] 제24 [[군단장]] [[존 리드 하지]] [[중장]]과 조선총독 아베 [[일본 육군]] [[대장(계급)|대장]]의 항복 문서 서명식이 있었다. 이후 미군정은 조선총독부 청사를 캐피탈 홀(Capital Hall)이라 불렀다. '''중앙청(中央廳)'''이란 이름은 당시 학자였던 [[정인보]]가 캐피탈 홀을 직역해 지은 것이다. [[1948년]] 5월 10일 중앙청 중앙 홀에서 [[대한민국 헌법]] 제정을 위한 역사적인 제헌 [[대한민국 국회|국회]]를 개의했고, 그해 [[7월 17일]] 1층의 메인 홀에서 헌법 공포식을 열였다. 1948년 [[8월 15일]]에는 청사 앞뜰에서 [[대한민국 정부]] 수립 선포식이 거행됐다. 이후 중앙청은 대한민국 정부의 청사로 사용됐으며, 정부 청사로서의 기능이 계속됐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로는 중앙 청사는 강점기와 동일한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다. 이 건물이 정부 청사로 사용되기 시작할 때도 그에 대한 비판이 없지는 않았다. 하지만 당시에는 조선총독부 청사만큼 정부 기관이 입주하기에 적절한 건물이 딱히 없었고, 본래는 신청사 건립 계획이 있었지만 [[6.25 전쟁]] 발발로 무산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. [[인천 상륙작전]] 후 후퇴하던 [[조선인민군|북한군]]이 [[서울]]을 조직적으로 파괴했고, 그 때문에 서울에 성한 2층 건물이 없을 지경이었다. 중앙청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불을 질렀는데,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라 파괴되진 않고 실내만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된다. 아무튼 서울 수복을 상징하는 [[대한민국 해병대]] [[장병]]들의 [[태극기]] 게양 [[사진]]이 찍힌 장소이기도 하다. ||<:> [[파일:attachment/capital_hall_national_flag.jpg|width=400]] || 일반 대중들이 9.28 서울 수복 당시 [[태극기]] 게양 장면으로 아는 이 사진은 사실 전쟁이 끝나고도 한참이 지난 [[1957년]] 서울 수복 기념 행사 때 재현 촬영한 것이다. 사진에서 중앙청 건물의 벽면이 흰색으로 깔끔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, 패주하는 [[북한군|인민군]]이 중앙청을 방화했기 때문에 수복 직후 중앙청 건물은 창문 유리가 대부분 깨지고 불이 난 건물 내부에서 창을 통해 연기가 나와 시커멓게 그을렸다. 이 사진이 1950년에 찍은 게 아니라는 증거들 중 하나다. 서울 전투가 종료된 후에도 얼마 동안은 이 게양대에 [[인공기]]가 그대로 걸려 있었고, 이걸 내리고 [[미군]]이 태극기가 아닌 유엔기를 달았다. 실제로 태극기를 게양했던 장소는 이 게양대가 아니라 사진에도 보이는 지붕 위 첨탑 방면이었다. 이 게양대는 중앙청이 해체되기 직전까지 남아 있었다. 수복 당시에 태극기를 걸었던 당사자인 대한민국 해병대 제2[[대대]] 6[[중대(군대)|중대]] 1[[소대장]]이던 박정모 예비역 해병[[대령]][* 서울 수복 당시 [[소위]]]도 생전에 중앙청을 해체하더라도 게양대는 남겨줬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, 결국 게양대도 철거됐다. 이 게양대 자리가 복원될 흥례문과 협생문과 그 일대였기 때문에, 경복궁 복원이 계획된 이상 특졍 개인의 의사에 따라 철거 여부를 결정할 순 없는 상황이었다. 이 태극기는 [[용산구]] [[전쟁기념관]]에 소장 중이다. 1953년 환도 후 제1별관 2층을 임시 국무회의실로 썼고, [[1962년]] 11월 22일에 [[6.25 전쟁]]으로 파괴된 청사를 복구해 중앙청 개청식을 열었다. 또 이때 중앙청 건물 밖 동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 안보회의 장소로 쓰일 [[벙커]]를 세우기도 했다. 1979년에는 [[경복궁]] 마방 터에 공무원 편의시설 '후생관'이 들어섰다. [[1968년]]에 서양식 정문이 철거되고 광화문이 콘크리트로 복원됐다. 1970년에는 바로 건너편에 [[정부서울청사|정부종합청사]]가 완공돼 대다수 기관들이 이전하고, 1982년에는 [[정부과천청사|정부제2종합청사]]가 완공되면서 [[대한민국 법무부|법무부]], 보건사회부, 농림수산부, 건설부, 과학기술처 5개 기관이 이전함에 따라 정부 청사로서 기능을 종료했다. 이에 따라 박물관으로의 개조 계획이 추진됐으며, 개보수 과정을 거쳐 [[1986년]] 8월 21일 [[국립중앙박물관]]으로 개관하였다. 이 과정에서 1983년 안보회의 벙커가 유물 보관소로 개조되었다. 중앙청 후생관은 국립중앙박물관 부속 사회교육관으로 개편돼 1995년 8월 14일까지 정상 운용하다가 1995년 8월 15일 [[문민정부]]의 [[역사바로세우기|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]]으로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를 시작하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던 문화재들 전부가 임시로 근처 벙커에 들어가 있었다. 이후 경복궁 경내의 당시 사회교육관 건물을 증축 및 개축해 근처 벙커에 임시로 보관 중이던 문화재를 이전했고 [[2005년]]부터는 [[국립고궁박물관]]으로 사용 중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